우츠의 의대에 재학 중인 비텍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학교를 휴학한 채 바르샤바행 기차를 타려 한다. 간발의 차이로 기차에 오르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이후 그의 삶이 크게 갈린다. 기차역 장면을 기준으로 이후의 삶이 세 가지 버전으로 펼쳐진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할 필요는 없어”라고 유언을 남기다 말았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꼭 의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 내지 “꼭 내 바람대로 살 필요는 없었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세 버전 중 하나에서 사실 “정말 아버지가 하려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즉, ‘의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는 해석은, 그 자신의 매우 적극적인 자기 바람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버전. 그는 가까스로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만난 이와의 인연으로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하고 당 간부가 되기 위해 착실한 과정을 밟는다. 그 와중 첫사랑과 재회하고 관계를 이어가는데, 첫사랑은 반체제 출판물을 펴내던 지하조직의 일원이다.
두 번째 버전. 그는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친다. 자신을 막던 역무원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그는 노역 중 반체제 지하조직의 일원을 만나 친구가 되고, 곧 자신도 그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의 회합에서 어린 시절 헤어진 친구와 그의 누나를 만나게 된다.
세 번째 버전. 역시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치는데, 두 번째 버전에서와는 다르게 순순히 체념한다. 역으로 자신을 배웅 나온 의대 동기 올가와 사랑을 꽃피운다. 의대로 복학하고 올가와도 행복한 가정을 이룬 그는, 공산당이든 반체제 조직이든 어떠한 정치적 집단에도 엮이기 거부한 채 그저 의사로서 전문적인 커리어를 충실히 쫓아간다.
똑같은 사람이 우연에 우연이 꼬리에 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산당원이 되기도, 반체제 조직의 일원이 되기도, 아예 정치에 거리를 둔 채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신을 믿기도 믿지 않기도 한다. 세 버전 각기 다른 여성과 에로틱한 사랑을 나누지만 그 사랑은 어긋나기도, 채 피우지 못하기도 하고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상이 시스템이든 사회이든 환자이든 최선을 다해 바꾸거나 고치고자 하는 열정이 비텍에게 있다. 그리고… 배신을 당한다. 세 개의 삶은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의 버전에서 같은 공간 바로 옆 무리에 있던 이가 다른 버전에서는 자신의 무리가 되기도 한다. 내 옆을 스쳐지나간 이는 어쩌면 과거 어느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우연’이란 요소에 의해 크게 삶의 궤적이 달라지는 세 가지 버전을 보여주는 데에서, 이 영화는 운명의 정해진 길따위 없이 인생이란 그저 순간의 어떤 선택에 따라, 그로 인한 연쇄 반응으로, 같은 사람이라도 길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 번째 삶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고 나면 이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는 것 같다. 비텍은 첫 번째, 두 번째 버전에서 파리행을 기획하지만(목적은 당의 출장 혹은 해외 반체제 인사들과의 접선 등으로 다르다) 번번이 좌절되었는데, 세 번째 버전에서 드디어 파리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하지만…
이 결말에 의하면, 우연에 의해 가게 된 그 모든 다른 길이 결국은 폴란드라는 거대한 폐쇄회로 안에 갇혀 있을 뿐이며 그는 절대로 폴란드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어떤 인생을 선택하든, 폴란드의 짙은 억압은 그에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예외적으로 빗겨가지 않는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든, 반체제 인사가 되든, 탈정치적인 전문직이 되든 말이다. 더 크고 강렬한 의미에서 ‘운명’을 이야기한달까.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이, 그 ‘마지막 장면’에서 목을 조른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선택하든, 누구를 사랑하고 어디에 헌신하든, 그는 결국 배신을 당한다. 배신의 주체가 사람인지, 시스템 혹은 인간 간 신뢰인지, 거대한 운명 그 자체인지만 다를 뿐.
폴란드 평론가 미카우 올레츠칙에 의하면 이 작품은 당대에 자유노조 ‘연대’의 입장을 명확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반체제인 ‘연대’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체제 운동을 할 수도 있었던 인물이 그저 작은 우연에 따라 오히려 젊은 공산당원(폴란드 정치권력의 중심)이 될 수도 정치에 회의적인 반-정치적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설정이 사람들의 화를 돋구었다고. 뭐, 그 당시엔 분명 논란이 되었을 수는 있겠다. 예컨대, 만약 똑같은 주인공이 작은 우연에 따라 친일파가 될 수도 독립운동가가 될 수도 혹은 그저 한량 모단보이가 될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영화가 개봉한다면 아마 지금의 한국에서도 엄청난 불매 운동과 조기 종영 요구가 이어질 게 뻔하니까. (2005년 <청연> 사례뿐 아니라 가장 최근에는 <조선구마사>의 사례도 있다.) 그만큼,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억압적이었던 공산당 체제에 대한 염증과 다른 세계를 향한 갈망이 큰 시대였을 테니.
하지만 세 에피소드를 면밀히 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당시 폴란드의 상황에 대한 암울한 절망과 은근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시대정신이고 나발이고 다 우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다’이라는 회색분자의 영화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지는, 글쎄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당 간부들이 한심하게 묘사되는 모습이나 비텍을 배신한 게 아담이고 그를 향해 비텍이 분노를 터뜨리다 절망에 빠지는 모습,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비텍과 그의 동료들의 처하게 되는 씁쓸한 상황이 당시 권력의 탄압에 의한 결과라는 점, 가장 안온한 삶이 이어졌던 마지막 버전에서 그런 결말(마치 주인공을 처벌하는 듯하게도 느껴진다)로 가버리는 걸 보노라면, 당시의 논란은 오히려 변화를 갈망했던 너무 예민한 시기라서 너무 뭉툭하고 성급하게 받아들여진 결과가 아닌가 싶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가 현재 폴란드의 영웅처럼 추앙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당시의 그런 격렬한 입장도 많이 극복된 것 같긴 하다.
ps. 영어 제목을 그대로 직역한 ‘맹목적인 기회’로 오랫동안 소개되었는데, 우리말에서 ‘맹목적’이라는 단어는 그저 ‘우연’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의미보다 부정적 어감이 강하기 때문에(ex. 맹목적인 신념, 맹목적인 믿음, 맹목적인 광기…), 이번에 상영하면서 한글 제목을 ‘우연한 기회’로 정하였다. chance에도 blind에도 우연이라는 뜻이 있어 일종의 동어반복의 제목이고 ‘기회’라는 단어 역시 1차 의미의 직역의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소개하는 영화의 제목을 그냥 ‘우연’이라고 해버리면… ‘우연의 삶’처럼 보다 의역한 제목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뒤늦은 아쉬움이 들기는 한다.
ps2. 90년대 한국에서는 “(이휘재의) TV 인생극장”이라는 게 굉장히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다. (“그래, 결심했어!”) 일본 예능을 이것저것 베낀 거라곤 하지만, 어쩌면, 그 일본 예능들도 실은 <우연한 기회>에서 포맷을 베껴온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잇다. 또 1998년에 국내에서도 개봉했던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영화도 포맷의 원천은 어쩌면… 1990년대 초중반에 키에슬로프스키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상당했었다. 그러니 프랑스에서는 자국의 국기 색을 모티브로 한 시리즈 영화를 다른 나라 출신인 그에게 맡기고,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세 가지 색: 레드>가 줄줄이 후보에 올랐지. 국내에서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뿐 아니라 <세 가지 색> 시리즈가 차례로 극장 개봉을 했었고,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도 비디오가 정식 출시됐었다. 무엇보다도 9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였고 ‘키노’가 나오던 시대였던지라… 하지만 정치.사회적 맥락, 그리고 그 포맷이 작동하는 전제가 된 철학을 다 떼어버리고 나면, 아이디어로서의 포맷이란 상당히 빈약한 철골이 될 수밖에. 무슨 말이냐 하면, <우연한 기회>가 굉장히 재밌다는 얘기다. 아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 번의 상영이 남아 있다.
ps3. 감독 이름의 원래 발음은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가 맞다고 한다. 그러나 키에’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